세계는 그 자체로 현존재에게 어떠한 의미를 부여해 주지 않는다. 현존재는 스스로를 세계 내 존재로 자각한다. 세계 내 존재인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 자신이 되도록 요청받는다. 즉 자신만의 고유한 삶을 살고자 한다. 본래적인 자신이 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내면에로의 귀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 귀환은 유한성의 극단인 죽음으로의 선구/선취를 통해 가장 극적으로 이루어진다. 생물학적인 죽음이 아니라, 죽음에 직면한 실존의 비 본래성의 자각이다. 죽음은 현존재의 “가장 고유하고 가장 극단적인 이면, 능가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죽음에 직면한 현존재는 연필처럼 무상하게 종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다. 그러므로 본래적인 존재가 되고 싶다는 결단에 이른다.

 

 

피투성은 던져졌다는 의미를 지닌다. 현존재와 연필은 둘 다 던져졌기 때문에 피투성의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현존재는 시간성/유한성을 의식하고, 자신이 이 세계 속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이 왜 던져졌는가에 대한 질문이 가능하다. 즉, 현존재는 세계 내에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다는 사실, 이러한 세계 속으로 수동적으로 던져졌다는 의식이 가능하다. 이것이 피투성이다. 기투는 던짐, 시도/기도의 의미를 지닌다. 현대는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해 오로지 계산적 사유만을 중요시하는 실증주의가 도래하게 되었다. 따라서 존재의 무의미와 공허감, 권태에 직면하였으며 니힐리즘이 도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하나는 끝임 없는 호기심과 흥밋거리를 추구함으로 공허감과 권태를 잊으려고 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것들의 원인을 찾고,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으면서 진정한 존재방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때 현존재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의 힘으로 개척하겠다는 결의를 하며 능동적인 삶을 살려고 하는데 이를 기투성이라 한다.

 

현대의 과학기술 1

 

과학기술시대의 존재 이해의 특성과 그 이해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 이유는? - 하이데거는 현대인의 삶과 정신은 세속적 과학기술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 즉, 계산적 확실성 혹은 검증 가능성(실증주의), 유용성만을 강조하는 기술적 사고방식(실용주의)과 생산성과 이익(공리주의)만을 중시하는 기계주의적 사고방식에 의해 현대는 좌우된다고 본 것이다. 모든 것이 도표화되고, 양적으로 측정 가능하고 단지 유용성에 의해 평가받는다. 누구도 존재의 참된 의미에 대해 묻지 않게 되었다. 즉, 참된 인간됨에 대한 이해의 실종을 가져왔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하이데거는 비판하였다.

 

현대의 과학기술 2

21세기 오늘의 사회는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미래를 예측하기 어려워운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 문명 속에서 역사는, 이념의 대립에서 탈피하여 경제의 충돌, 나아가 문화의 충돌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문화는 그 영역을 확대하여 산업적 차원의 의미가 날로 증대하고 있으며, 특히 대중문화는 과거 엘리트문화의 대립적 개념에서 탈피하여 현대 문화 흐름의 본류로 자리매감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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